필란트로피, 새로운 길을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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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필란트로피,

새로운 길을 내다


Power & Trust


서현선


권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권력은 공기와 같다. 권력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규정하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권력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권력이 일종의 구조와 제도를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권력은 실체가 있는 구조와 제도를 만들고, 우리는 그 구조와 제도 속에서 매일매일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권력은 에너지를 부여한다. 자원을 투입하고, 사람을 모으고, 기한을 설정하여 일이 실행되게 만든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많은 혹은 더 큰 일을 실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일을 위한 목표와 기획이 있다고 해서 그 일이 실행될 충분조건이 만족되지는 않는다. 일이 추진되기 위해서는 그 일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자원을 투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기한에 맞게 관리할 주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권력은 방향을 제시한다.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지, 누가 누구를 향해 소통하고 일해야 하는지, 무엇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 권력은 구조와 제도로서 작동하기도 하지만 문화와 관행으로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권력의 흐름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을 인지하고, 더 나은 권력의 작동 방식을 성찰하며, 어떤 주체들에게 더 많은 혹은 더 나은 권력을 부여해야 하는지 사유해야 한다. 이 과정은 많은 시간을 요구하며, 저항을 일으킬 수도 있기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기 어렵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권력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일 또한 흔하지 않다. 문제해결을 위한 대화의 주제에서 권력은 제외되기 쉽다. 안타깝게도 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예민한 주제로 받아들여지거나 정치 영역에 속한 주제로 치부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변화를 만들고자 한다면 권력은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주제이다.


이번 특별호의 주제는 ‘권력과 신뢰Power & Trust’이다. ‘권력Power’편에서는 필란트로피 영역에서의 권력 구조를 진단하고, 이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정면으로 다룬다. 이 단행본의 아티클들은 필란트로피의 권력 구조에 대한 이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필란트로피 관행에 정면으로 저항한 실험에 대한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그 현장 보고서의 중심에는 코러스 재단의 파하드 에브라히미Farhad Ebrahimi가 있다.


재단은 영속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파드하드 에브라히미는 2007년 5천만 달러 기금을 가지고 코러스 재단을 설립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에 불과했다. 그의 아버지가 큰 성공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그에게 상속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대에 수백억대 재단의 대표가 되었다는 점도 눈길을 끌지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난민 출신이라는 점 또한 파드하드가 남다른 행보를 하게 만든 요인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신의 부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고, 부의 격차를 발생시키는 사회 구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또한 난민의 후손으로서 공동체 자결권community self-determination의 가치가 그에게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코러스 재단은 2023년까지 모든 기금을 소진하고 재단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운영상의 어려움 때문이 아닌 재단의 설립 목표를 완성하기 위한 의도적 선택이었다. 이 결정은 필란트로피 영역에서 이례적인 사건으로 커다란 질문을 던졌다. 


“전 지구적 위기 앞에서 재단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회적 미션보다 스스로를 영속시키려는 목적을 우선하고 있지 않은가?”


“필란트로피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재단의 우선순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코러스 재단은 자신의 영속성보다는 지원 대상이었던 파트너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길을 선택했다. 문제해결의 최전선에 있는 단체들에게 자산을 나눠주고, 기반을 마련해줌으로써 재단이 영향력을 장기적으로 행사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이는 재단이 누려온 권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의 결과이기도 하다. 필란트로피 영역에도 권력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의심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재단은 자원을 배분하고, 의제를 설정하고, 전략을 결정하는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 권력의 크기와 작동 방식이 올바른지에 대해서는 질문받지 않는다. 이 단행본에서는 코러스 재단의 파드하드를 비롯해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다른 길을 선택한 여러 재단과 리더들이 필란트로피 영역에서의 권력에 대해 어떤 성찰과 새로운 시도를 해왔는지 소개한다.


코러스 재단이 자신들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남긴 기록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읽힌다. 새로운 재단의 길을 제시한 현장 가이드로 읽히기도 하고, 필란트로피 영역이 다루어야 할 중요한 연구 주제로 읽히기도 한다. 또한 코러스 재단이 생각해 낸 창의적인 유언장으로도 읽힌다. 이 글이 한국의 필란트로피 생태계에 새로운 생각과 성찰을 자극할 수 있기를, 더 나은 길을 고민하는 재단들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