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란트로피, 본연의 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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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필란트로피,
본연의 길을 가다

Power & Trust


서현선



신뢰는 자란다. 땅속에 심겨진 씨앗이 자라듯 그렇게 신뢰도 천천히 자란다.


신뢰는 건강한 관계 속에서 자란다. 땅속에 심겨진 씨앗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신뢰는 건강한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며 천천히 자란다. 신뢰를 쌓아가는 일은 인내를 요한다. 이는 효율이나 성과를 신속하게 거두겠다는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다. 신뢰는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요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정보를 많이 수집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상대의 평판이나 행적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해서 상대를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인격적인 만남의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상대의 일상과 환경을 함께 경험하고, 상대의 고민과 목표를 공감하는 것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통해 관계 안에서 신뢰는 자란다.


건강한 관계성 속에서 구축된 신뢰는 탄탄한 자산이 된다. 신뢰는 인간관계, 조직, 사회의 성과를 좌우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신뢰가 높아지면 효율성과 속도가 높아지고, 신뢰가 결핍되면 비용과 갈등이 증가한다. 신뢰가 낮을 때 우리는 서로를 관리하고 통제하며 검증하는 데 시간과 비용을 들이게 된다. 반대로 신뢰가 높을 때 결정과 합의가 수월해지고, 배려와 협력의 가능성이 높아질 뿐 아니라 집단지성이 발휘될 수 있다. 단기적인 효율과 속도를 우선하면 신뢰를 쌓기 어렵지만, 긴 안목으로 신뢰를 축적하면 효율과 속도가 오히려 높아지는 것이 신뢰의 마법이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책 '신뢰의 속도'에서 신뢰 구축의 핵심 요소로 성실성integrity, 의도intention, 역량capabilities, 결과result를 꼽는다. 말하자면, 서로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 없이 각자의 역량과 성실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협력하며, 결과를 완수할 때까지 모두가 책임을 다하리라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뢰의 유익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뢰가 분명한 유익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신뢰를 쌓는 일은 그다지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신뢰를 축적하는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신뢰에 반하는 행동이나 관행을 돌아보고 이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긴 호흡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필란트로피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필란트로피 영역이 과연 신뢰를 축적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신뢰를 막는 불평등한 권력구조와 관행을 드러내며, 우리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선한 목적을 추구하는 필란트로피 영역에서 상호에 대한 불신이 지속되고, 긴장과 갈등이 유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권력과 신뢰Power & Trust’를 주제로 한 이번 특별호 중 ‘신뢰Trust’ 편에는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Trust-Based Philanthropy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다양한 조직과 리더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번 호에 실린 아티클에서는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가 왜 부상하게 되었는지, 왜 지원기관의 책임에 대해 재정의해야 하는지, 기업이 지역사회를 위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비영리단체들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재단의 운영 방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등을 다룬다.


아티클의 필자들은 필란트로피 생태계의 구조적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이러한 토양이 변화하지 않으면 신뢰가 자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지원기관이 지원 대상을 타자화하는 태도, 불평등한 권력구조, 전략적 필란트로피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과도한 심사와 증빙 요구, 지원기관의 과도한 데이터 수집과 일방적인 피드백 시스템 등 필자들은 필란트로피 생태계의 깊숙한 문제들을 드러내며 변화를 촉구한다. 아티클의 사례가 대부분 미국의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야기는 한국의 맥락에서도 공감을 일으킬 만하다. 한국의 필란트로피 생태계도 유사한 문제를 갖고 있으며, 한국의 상황이 더 심각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갑을관계로 표현되는 권력구조, 과도한 행정과 증빙 관행, 운영비에 대한 제약이 많은 지원금, 양적 성장 목표와 임팩트 수치에 대한 압박 등 한국의 필란트로피 생태계에도 드러내고 변화시켜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다뤄지지 않는다면 신뢰의 구축을 구조적으로 가로막는 장벽이 될 것이다.


결국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의 동력은 ‘신뢰가 필란트로피의 중추적 가치’라는 인식과 ‘재단 스스로가 불평등한 구조를 지속시킬 수 있다’는 자각에 있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최근 많은 재단들이 지원체계를 단체의 활동 주기에 맞게 바꾸고, 불필요한 보고와 행정을 간소화하며, 비영리 리더들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쉼을 지원하는 등 신뢰를 기반으로 한 시도를 현재형으로 진행하고 있다.


신뢰는 저절로 자라지 않으며 필란트로피 영역 전반의 변화 또한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지원기관이 자신의 권력을 성찰할 때, 파트너 단체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일 때, 기존의 문화와 지원 방식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점검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파트너 단체들의 역량과 미래에 대해 함께 책임감을 가질 때 변화는 가능할 것이다. 이 글이 한국의 필란트로피 생태계에 깊은 성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더 선한 길을 고민하는 재단들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